발생시각 : 2024년 5월 13일 19시
여느 날처럼 사지방에서 시험공부를 하던 중, 의무병 선임이 전화로 나를 불렀다.
"OO야, 한 명이 풋살 하다가 갑자기 상태가 안 좋아 보인다. 잠시 내려와 볼래?"
사실 군대에서 군사훈련보다 많이 다치는 활동이 바로 풋살이다.
보통 풋살을 하다 온갖 관절질환, 근육통, 심지어 골절 등을 주소로 의무실로 내원한다.
또 풋살하다 다리를 다쳤겠거니 하면서 의무실로 내려갔는데,
나의 맞선임인 환자의 상태가 예상보다 심각해 보였다.
얼굴이 흙빛이었고, 눈 주위와 목 안쪽이 붓고 가려우며 명치 부분이 불편하다고 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원래 메밀 알러지가 있었는데 '괜찮겠거니' 하면서 냉면 한 그릇을 PX에서 사 먹은 후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
곧바로 손가락을 통해 혈중산소포화도(SpO2)를 측정하였고 83%가 나왔다.
요양병원에서 일할 때 생명이 위중한 환자들에게서나 보던 수치다.
모든 것이 응급상황으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국방부 군의 업무 훈령》 제 6조에 따르면, 의사면허를 가진 의무병은 응급상황에 진료를 수행할 수 있다.
"지금 즉시 당직사령님 불러서 앰뷸런스 준비해 주십쇼"
긴급히 의무실 약장 자물쇠를 따서 페니라민(항히스타민)과 소론도(스테로이드)를 먹였다.
앰뷸런스는 금방 도착했고, 풋살을 하다가 놀라서 달려온 다른 선임들을 뒤로 하고 환자를 앰뷸런스에 태웠다.
나 또한 에피네프린 주입을 위해 의무실에서 에피네프린 앰플들을 박스채로 챙겨 앰뷸에 동승했다.
다행이 환자는 심각한 수치들이 무색하게 거동과 의식에 문제가 없었고, 호흡곤란도 호소하지는 않았다.
나는 가이드라인에 따라 에피네프린 근육주사를 준비하려고 니들(needle)과 주사기를 찾았지만,
불행이도, 나와 의무실 선임이 아무리 뒤져도 앰뷸런스 안에서 니들을 찾을 수가 없었다.
"태규야, 주위 병원 응급실로 갈까, 아니면 춘천병원으로 갈까?"
에피네프린을 못 쓰는 상황에서 환자가 언제 악화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제일 가까운 응급실로 향할지, 아니면 편도 20분 거리에 있는 군 병원인 국군춘천병원을 향할지 고민했다.
나의 판단으로 환자 상태가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산소를 공급하면서 국군춘천병원으로 밟기로 했다.
이에 앰뷸런스 운전병인 김 병장은 능숙한 운전솜씨로 어두운 춘천 시내를 고속으로 주파했다.
앰뷸런스 안에서 의식이 처지면 기도확보 준비를 해야하기 때문에,
나는 환자에게 계속 말을 걸면서 혈중산소농도와 혈압을 모니터링했다.
산소농도는 85에서 90 정도를 맴돌고 있었고, 혈압은 100/60 정도로 아슬아슬했다.
다행이 김 병장의 뛰어난 운전실력 덕분에 15분만에 국군춘천병원 응급실에 도착했다.
환자는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리던 에피네프린 근육주사를 맞을 수 있었고,
이후 약 2시간 정도 경과관찰 끝에 무사히 회복하여 퇴원할 수 있었다.
밤 10시에 가까운 시각,
병원을 떠나 부대 복귀를 위해 텅 빈 춘천 도로를 달리는 앰뷸런스는 어두운 소양강변을 지나친다.
소양강 물결에 잔잔히 비친 건물들의 아름다운 불빛을 감상하는 것은 그야말로 낭만 그 자체다.
이번 상황처럼 나의 판단이 필요한 상황이 있다는 것 자체가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매니악한 취향일 수 있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정신이 고양되며 보람차다는 느낌을 받는다. (의뽕 MAX)
요양병원에서 근무할 때에도 환자들이 산소포화도가 처지는 경우를 매우 많이 보았다.
하지만 요양병원에서는 질식이 원인인지, 폐렴이 원인인지, 흉수가 원인인지 등의 원인을 밝혀내기 힘든 경우가 많고, 이 때는 경과관찰을 할지 응급실로 전원시킬지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하지만 아나필락시스와 같이 진단명이 거의 확실하며 처치도 확실한 경우라면 오히려 확실한 응급상황이기 때문에 나의 판단에 자신감이 붙는다.
너무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앰뷸런스를 최근 한 번 점검했음에도 공식 지침에 없어서(...) 니들이 없던 것인데, 이번 일을 계기로 앰뷸런스 기재에 니들을 추가하는 계기도 되었다.
환자의 주관적 증상이 경미했기에 망정이지, 만약 더욱 심각했다면 불미스러운 결과를 낳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예비의무병들은 군의관 부재 시 항상 응급처치를 실시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① 아낙필락시스에서 에피네프린 사용의 절대적 금기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② 혈압이 정상 이더라도 아나필락시스를 배제하면 안 된다는 점
③ 아나필락시스의 진단기준에 당장은 부합하지 않더라도 아나필락시스의 가능성이 높거나 임박한 상황이라면 지체없이 에피네프린을 투여하는 것이 환자에게 이득이라는 점
을 기억해 두면 좋을 것 같다.
또한 본과 2학년 알레르기학과 본과 3학년 응급의학 실습때 수 차례 배우겠지만,
아나필락시스의 진단법은 3개의 방법이나 존재하고, 아래 3개의 방법 중 어느 하나에만 부합하면 지체없이 아나필락시스를 진단할 수 있다.

군 보급 에피네프린 1mL 앰플 기준 절반 용량인, 0.5mL를 뽑아서 외측 허벅지에 고민 없이 주입할 수 있는 정예 의무장병의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보통 이러한 상황을 잘 대처한다면 의사로서의 뿌듯함과 더불어 포상도 따라오게 된다.
P.S. 미국행 응원해주신 국군춘천병원 군의관님 감사합니다 :)